지난 8년간 1,000여 개의 브랜드의 스토리를 발굴해 온 국내 최대 브랜드 커뮤니티, 비마이비. 비마이비는 하나의 브랜드를 깊이 다루거나, 하나의 주제를 넓게 다루며 브랜드를 큐레이션하고, 사람을 만나고, 매월 이달의브랜드를 선정합니다.
이번 주의 마이비레터에서는 럭셔리 브랜드의 디자이너를 영입하는 SPA 브랜드, SPA브랜드로 향하는 디자이너들을 통해 패션 지형의 움직임에 대해 다룹니다.
2026년 3월, 존 갈리아노가 자라와 2년짜리 크리에이티브 파트너십을 맺는다는 소식이 전해졌어요. 디올에서 15년간 쇼를 하나의 무대 예술로 만들어온 디자이너, 메종 마르지엘라의 아카이브를 해체하고 재조립하며 럭셔리 패션의 문법을 다시 쓴 디자이너가 이제 자라의 아카이브를 뒤지며 새 컬렉션을 만들겠다는 선언에 많은 사람들의 가슴이 뜁니다.
업계는 이제는 당연한 수순이라는 시선과, 황당하다는 두 갈래의 반응으로 나뉘었어요. 그런데 마이비레터는 이 소식을 자라와 존 갈리아노만의 이야기로 보지 않았습니다. 단 2년 사이에 럭셔리 메종의 핵심 크리에이티브들이 줄줄이 SPA 브랜드로 자리를 옮겼거든요
이러한 지각 변동의 배경에는 럭셔리 시장의 변화가 있어요. 2019년부터 2024년 사이, 럭셔리 브랜드들은 처음에는 인플레이션과 장인정신의 가치를 이유로 내세우며 평균 50~70퍼센트에 달하는 가격을 올렸고, 그 결과 2024년까지 약 5천만 명의 소비자가 럭셔리 시장에서 떠났어요. 주된 이탈자는 브랜드를 동경하지만 엔트리 라인마저 가격이 손에 닿지 않는 곳까지 올라가버린 어스피레이셔널 소비자들이에요. 이들이 빈티지 마켓이나 리세일 플랫폼으로 이동하는 동안, SPA는 그 빈자리를 향해 크리에이티브 권위를 앞세워 다가가기 시작했어요.
SPA 브랜드가 지금까지 플레잉 해왔던 브랜드간의 콜라보레이션과는 다른 움직임, 패션 산업의 다음이 될 수 있는 지금 이 순간을 마이비레터와 함께 하세요.
01 이 모든 것의 시작, 유니클로
럭셔리 브랜드 디자이너를 정식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영입의 시작은 2009년의 유니클로였어요. 주인공은 질 샌더, 현대 럭셔리 미니멀리즘의 원형을 만든 디자이너예요. 불필요한 장식을 모두 걷어낸 뒤 소재와 재단만으로 옷을 완성하는 방식으로, 1990년대 패션계에서 가장 급진적인 미니멀리스트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당시 그의 컬렉션을 두고 패션 평론가들은 빼는 것이 가장 어려운 디자인이라고 표현했죠. 아르마니, 베르사체와 함께 밀라노 패션을 이끈 세 축 중 하나였던 그 질 샌더가 유니클로의 남녀복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맡았고 소비자는 열광했어요. +J라는 이름으로 출시된 라인은 곧 품절 사태가 이어졌죠.
질 샌더와 유니클로의 만남 / 자료 출처 유니클로
사실 단발성 캡슐 협업까지 포함한다면, 이 장르의 문을 처음 연 건 2004년의 H&M과 칼 라거펠트의 컬렉션이었어요. 하지만 유니클로는 한 시즌짜리 협업이 아닌, 디자이너에게 브랜드 라인 전체의 크리에이티브를 맡겼습니다. 질 샌더의 미학과 유니클로의 철학이 충돌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 이유도 살펴볼만해요. 불필요한 걸 걷어내고 소재와 쓰임에 따른 디자인으로 승부하는 등, 두 브랜드의 포지셔닝과 가격은 달랐지만 무척이나 닮아 있었습니다. 둘의 정합이 +J를 단순한 콜라보레이션이 아니라 하나의 브랜드로 느끼게 만든 이유였죠. 2011년 계약이 끝났다가 2020년 다시 한번 부활한 것도 이들의 찰떡궁합을 방증하는 사례에요.
2020년에 다시 돌아온 +J / 자료 출처 유니클로
유니클로의 전략은 2024년 지방시와 클로에를 거친 클레어 웨이트 켈러의 영입으로 본격화됩니다. 켈러는 지방시 아티스틱 디렉터 시절, 2018년 영국 왕실 결혼의 웨딩드레스를 디자인한 디자이너예요. 해리 왕자 옆에 나란히 선 메건 마클이 입은 웨딩드레스가 전 세계 중계 화면에 잡히던 순간, 패션계 안팎에서 그녀의 이름이 검색됐어요. 그 덕분에 타임지가 선정한 2019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명단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죠. 다만 유니클로는 그녀를 바로 메인 CD로 앉히지 않았어요. 2023년 먼저 유니클로 : C라는 서브라인 디자이너로 합류시키고, 1년의 기간을 거친 뒤 2024년 남녀복 전체를 총괄하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승격시켰습니다. 유니클로는 브랜드가 보유한 다양한 라인에 부분적 혹은 순차적으로 디자이너를 녹여 내며, 브랜드와 디자이너의 색깔 모두 잃지 않는 방식으로 SPA 생태계를 리드하고 있었어요.
클레어 웨이트 켈러와 그녀의 컬렉션 / 자료 출처 uniqlo today
02 브랜드의 포지셔닝에 따라, GU
유니클로의 자매 브랜드 GU는 더 저렴하고 더 트렌디한 포지션에 있어요. 유니클로가 LifeWear라는 철학으로 낡지 않는 기본을 지향한다면, GU는 그보다는 조금 더 예민하게 현재의 시즌을 더 빠르게 반영하는 브랜드예요. 같은 패스트 리테일링 그룹 안에 있지만 목표, 타깃, 지향 모두 달라요. 단순히 유니클로보다 가격과 퀄리티가 가벼운 브랜드는 아닌 것이죠.
2026년 초, 패스트 리테일링은 마르니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였던 프란체스코 리소를 GU의 CD로 임명했어요. 리소는 2016년부터 2025년까지 마르니를 이끈 디자이너예요. 마르니는 원래 패션 인사이더 중심으로 소수의 열광을 받던 컬트 브랜드였는데, 그가 재임하는 동안 MZ세대가 가장 열망하는 브랜드 중 하나로 바뀌었어요. 그 비결은 색의 활용. 색 활용의 기존 문법을 따르지 않는 색 조합이 하나의 콤비가 되었고, 그것이 마르니를 설명하는 그 자체가 되었죠. 10년간 함께한 그가 마르니를 떠날 때 업계 반응이 아쉬움으로 가득했던 건, 브랜드에 변화를 주는 것을 넘어 새로운 장을 열었기 때문이었을거예요.
2022년에 진행했던 마르니와 유니클로의 합작 / 자료 출처 마르니
그런 리소를 GU에 영입한 패스트 리테일링의 포트폴리오 설계와 브랜드 포지셔닝 전략이 눈 여겨 볼 만해요. 유니클로에는 클레어 웨이트 켈러와 크리스토프 르메르(에르메스 여성복 CD 출신으로 유니클로 U를 10년째 이끌고 있어요)를, GU에는 프란체스코 리소를. 그룹 안에서 각 브랜드의 가격대와 방향 및 감도에 맞는 디자이너를 다르게 배치한 것이죠. 어떤 디자이너를 어느 브랜드에 붙이느냐에 따라 그 브랜드가 나아가고자 하는 것이 달라지고, 그 방향성이 곧 브랜드의 포지션닝이 되기 때문이죠.
GU와 리소의 만남은 어떤 작품을 보여줄까? / 자료 출처 마르니
03 유연함과 정통성의 만남, 자라
지방시, 디올, 마르지엘라를 자신의 색으로 입혀온 존 갈리아노. 갈리아노가 어떤 디자이너인지는 그의 디올 시절 새들백을 디자인하고, 그가 15년동안 선보인 아카이브 피스들이 지금 경매에서 수십만 달러에 거래된다는 사실로 말할 수 있어요. 마르지엘라에서 보낸 10년은 디올과는 대조적으로 화려한 연출보다는 브랜드의 해체와 재구성에 집중하며, 컬트 브랜드에서 가장 뜨거운 럭셔리 하우스로 끌어 올린 시간이었죠. 그 디자이너가 이제 자라와 2년짜리 크리에이티브 파트너십을 선언했습니다.
2020년에 마르지엘라에서 해체주의와 재구성의 정수를 보여준 존 갈리아노 / 자료 출처 Gorunway
자라는 그 이전에도 럭셔리 디자이너와의 협업을 시도해왔어요. 나르시소 로드리게스, 케이트 모스, 스테파노 필라티와의 캡슐 컬렉션이 있었죠. 하지만 모두 한 시즌짜리의 프로젝트였어요. 갈리아노와의 만남은 자라의 아카이브를 해체해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진행돼요. 단순히 디자이너의 이름을 빌리는 게 아니라, 그의 디자인 철학을 브랜드 안으로 깊숙히 들이는 것이죠. 첫 결과물은 2026년 9월 FW 시즌부터 순차적으로 공개될 예정이에요.
자라와 크리에이티브 파트너십을 체결한 존 갈리아노 / 자료 출처 존 갈리아노
이 파격적인 뉴스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현재 패션 시장에서의 자라의 상황을 살펴 볼 필요가 있어요. 산업 내에서 독특한 포지션을 차지하고 있던 패스트 리테일과 SPA 시장에 쉬인, 테무 같은 울트라 패스트 패션이 속도와 가격에서 자라를 압도하기 시작했어요. 더 빠르게, 더 싸게의 경쟁에서는 더 이상 자라가 우위에 있지 않아요. 그래서 자라가 선택한 것은 디자인의 속도 경쟁이 아닌 브랜드에 문화와 권위를 들이는 것이었어요. 아카이브 피스가 경매에서 수십만 달러에 거래되는 디자이너, 쇼 하나가 예술적 사건으로 기록된 디자이너와의 파트너십은 자라라는 브랜드에 지금까지 없었던 정통 있는 크리에이티브를 부여해요. 천재 디자이너가 지금까지 걸어온 럭셔리 패션의 정통성과 방법론을 브랜드 안에 이식하는 방식으로 지금의 상황을 타개하고 앞으로 나아갈 길을 찾고자 하는 것입니다. 결과가 어떨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이 만남이 SPA 브랜드는 물론이고 패션계 전체가 주목할 장면이라는 것은 분명해요.
2024년에 존 갈리아노가 마르지엘라에서 보인 작품
04 새로운 기대, 갭
갭GAP은 조금 다른 맥락에서 이 카드를 꺼내 들었어요. 유니클로나 자라처럼 브랜드가 성장하는 국면에서의 선택이 아니라, 잃어버린 정체성을 찾기 위해서 꺼낸 카드이기 때문이에요. 갭은 수십년 동안 미국 캐주얼 문화의 아이콘이었어요. 그 이미지가 흐릿해지는 동안 브랜드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어요. 여러 번 크리에이티브 방향을 바꾸려 했고, 2020년대 초 칸예 웨스트와의 10년 파트너십 계획이 2년 만에 파탄 난 것도 그 시도 중 하나였죠.
갭의 크리에이티브를 이끌고 있는 잭 포즌 / 자료 출처 잭 포즌 SNS
2024년 영입한 잭 포즌은 할리우드와 가장 가까이 있었던 디자이너입니다. 나탈리 포트만, 클레어 데인스, 리한나의 레드카펫 드레스를 도맡았고, 미국 대통령 취임식 무대에 오른 드레스도 그의 손에서 나왔어요. 재단의 정교함으로 유명해서, 한 인터뷰에서 ‘나는 옷이 몸을 만나는 순간을 설계한다’고 말하기도 했죠. 그럼에도 자신의 이름을 내건 브랜드는 2019년에 파산했어요. 럭셔리 시장의 구조 안에서 독립 브랜드로 살아남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준 사례였죠. 갭은 그럼에도 그의 크레딧을 샀습니다.
클래식과 정적임, 그리고 럭셔리의 만남 / 자료 출처 패션비즈
결과는 곧 바로 나타났어요. 포즌이 다빈 조이 랜돌프를 위해 만든 메트 갈라 드레스, 앤 해서웨이가 입은 화이트 셔츠 드레스는 온라인에서 빠르게 품절됐어요. 팝업과 패션쇼를 통해 갭이라는 이름이 다시 대화 안에 올라오기 시작했죠. 케데헌의 이재(김은재)도 커스텀 드레스를 입고 공식 석상에 섰어요.
잭 포즌의 갭을 입은 앤 해서웨이 / 자료 출처 패션비즈
다만 이 전략의 한계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디자이너 한 명이 브랜드의 모든 구조적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거든요. 포즌의 영입으로 화제와 세일즈는 만들었지만, 그것이 장기적인 브랜드 자산으로 이어질지는 다른 문제이죠. 10년 후에 돌아 보았을 때에, 이 영입이 또 다른 프로젝트의 사례로 끝날지 브랜드의 역사를 바꿀 수 있을지, 그 스토리는 아직 진행중입니다.
05 디자이너들이 움직이는 이유
이쯤에서 질문의 방향을 바꿔 볼게요. SPA가 디자이너를 원하는 이유에서, 반대로 ‘디자이너들이 SPA를 선택하는 이유’로요. 정량적인 이유로는 안정적인 보수와 브랜드가 보유한 수천 개의 매장, 수백만 명의 고객, 글로벌 공급망 등의 거대한 인프라라고 할 수 있어요. 럭셔리 메종에서는 꿈도 꾸지 못할 고객 도달 범위를 SPA는 제공하고 있는 것이죠. 킴 존스가 중국 아우터 브랜드 보시덩의 서브 브랜드 Areal을 맡으면서 샤넬, 에르메스, 프라다처럼 독립적으로 크게 될 수 있다고 말한 것, 프란체스코 리소가 리얼 피플을 위한 옷을 만들고 싶다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말이죠. 그간 SPA가 쌓아 온 인프라와 시간을 비롯해, 소비 심리와 경제 상황, SNS을 통한 다양한 콘텐츠의 생성 등 패션 업계 내외부의 복합적인 환경에 영향을 받으며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어요.
보시덩의 서브 브랜드 Areal로 향한 킴 존스 / 자료 출처 하입비스트
럭셔리 메종이 맺고 있는 크리에이티브와의 관계 및 고용 형태도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어요. 1990년대 칼 라거펠트는 샤넬에서 36년을, 마크 제이콥스는 루이 비통에서 16년을 이끌었어요. 당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라는 자리는 긴 호흡으로 브랜드의 색을 함께 만들어 가는 역할이었죠. 지금은 그 호흡이 많이 짧아졌습니다. 최근 데이터에 따르면 2020년대 주요 메종의 평균 CD 재임 기간은 약 3년으로, 1990년대의 평균 재임 기간인 10년에서 크게 줄었어요.
2024년과 2025년은 이 현상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난 시기예요. 샤넬, 셀린느, 보테가 베네타에 새로운 수장이 동시에 부임했고, 구찌는 임명된 지 2년 만에 사바토 데 사르노를 교체했어요. 디올과 마르지엘라도 수장이 바뀌었고요. 한 해에 이 규모의 메종들이 동시에 크리에이티브 리더십을 교체한 건 전례를 찾기 어려운 수준이에요. 크리이에티브의 자율성보다 재정 압박과 주주 기대치가 브랜드의 의사 결정에 더 깊숙히 관여한 결과이죠.
이러한 상황 속에서 SPA는 디자이너들에게 새로운 길을 제안하는 것이에요. 이제는 럭셔리 브랜드에서 SPA 브랜드로의 이동이 과연 커리어의 후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은 오뜨 꾸뛰르 쇼에서 볼 수 있는 크리에이티브가 4만 원짜리 셔츠에 담길 수 있는 이런 흐름을 패션의 상향 평준화로 보시나요, 아니면 하향 평준화로 보시나요? 런웨이의 문법을 SPA 브랜드의 피팅룸에서 걸쳐볼 수 있는 것을 희소성의 말소라고 보아야 할까요? SPA 브랜드에 새로운 바람이 부는 동시에 럭셔리의 문턱이 낮아지는 일이 동시에 일어나는 것, 그 두 방향이 서로를 상쇄하면서 패션의 개념 자체가 다시 정의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유니클로 U를 만들어 가고 있는 사라 린 트란과 크리스토프 르메르 / 자료 출처 유니클로
여러 층의 패션계는 결국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럭셔리 브랜드는 어스피레이셔널 소비자를 잃은 빈자리를 초고가 전략과 극소수 VIP 고객으로 채우려 하고, SPA는 그 이탈한 소비자들을 크리에이티브 권위로 흡수하고자 하고 있죠.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 메릴 스트립이 말했던, 럭셔리 브랜드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새로운 패션과 색을 만들면 아울렛으로 대중에게 흘러가는 구조. 그 구조는 이제는 어제까지의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오늘 레터에서 다룬 이야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비마이비는 우선 존 갈리아노의 자라가 너무도 기대됩니다.
지난 8년간 1,000여 개의 브랜드의 스토리를 발굴해 온 국내 최대 브랜드 커뮤니티, 비마이비. 비마이비는 하나의 브랜드를 깊이 다루거나, 하나의 주제를 넓게 다루며 브랜드를 큐레이션하고, 사람을 만나고, 매월 이달의브랜드를 선정합니다.

이번 주의 마이비레터에서는 럭셔리 브랜드의 디자이너를 영입하는 SPA 브랜드, SPA브랜드로 향하는 디자이너들을 통해 패션 지형의 움직임에 대해 다룹니다.
2026년 3월, 존 갈리아노가 자라와 2년짜리 크리에이티브 파트너십을 맺는다는 소식이 전해졌어요. 디올에서 15년간 쇼를 하나의 무대 예술로 만들어온 디자이너, 메종 마르지엘라의 아카이브를 해체하고 재조립하며 럭셔리 패션의 문법을 다시 쓴 디자이너가 이제 자라의 아카이브를 뒤지며 새 컬렉션을 만들겠다는 선언에 많은 사람들의 가슴이 뜁니다.
업계는 이제는 당연한 수순이라는 시선과, 황당하다는 두 갈래의 반응으로 나뉘었어요. 그런데 마이비레터는 이 소식을 자라와 존 갈리아노만의 이야기로 보지 않았습니다. 단 2년 사이에 럭셔리 메종의 핵심 크리에이티브들이 줄줄이 SPA 브랜드로 자리를 옮겼거든요
이러한 지각 변동의 배경에는 럭셔리 시장의 변화가 있어요. 2019년부터 2024년 사이, 럭셔리 브랜드들은 처음에는 인플레이션과 장인정신의 가치를 이유로 내세우며 평균 50~70퍼센트에 달하는 가격을 올렸고, 그 결과 2024년까지 약 5천만 명의 소비자가 럭셔리 시장에서 떠났어요. 주된 이탈자는 브랜드를 동경하지만 엔트리 라인마저 가격이 손에 닿지 않는 곳까지 올라가버린 어스피레이셔널 소비자들이에요. 이들이 빈티지 마켓이나 리세일 플랫폼으로 이동하는 동안, SPA는 그 빈자리를 향해 크리에이티브 권위를 앞세워 다가가기 시작했어요.
SPA 브랜드가 지금까지 플레잉 해왔던 브랜드간의 콜라보레이션과는 다른 움직임, 패션 산업의 다음이 될 수 있는 지금 이 순간을 마이비레터와 함께 하세요.
01 이 모든 것의 시작, 유니클로
럭셔리 브랜드 디자이너를 정식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영입의 시작은 2009년의 유니클로였어요. 주인공은 질 샌더, 현대 럭셔리 미니멀리즘의 원형을 만든 디자이너예요. 불필요한 장식을 모두 걷어낸 뒤 소재와 재단만으로 옷을 완성하는 방식으로, 1990년대 패션계에서 가장 급진적인 미니멀리스트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당시 그의 컬렉션을 두고 패션 평론가들은 빼는 것이 가장 어려운 디자인이라고 표현했죠. 아르마니, 베르사체와 함께 밀라노 패션을 이끈 세 축 중 하나였던 그 질 샌더가 유니클로의 남녀복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맡았고 소비자는 열광했어요. +J라는 이름으로 출시된 라인은 곧 품절 사태가 이어졌죠.
질 샌더와 유니클로의 만남 / 자료 출처 유니클로
사실 단발성 캡슐 협업까지 포함한다면, 이 장르의 문을 처음 연 건 2004년의 H&M과 칼 라거펠트의 컬렉션이었어요. 하지만 유니클로는 한 시즌짜리 협업이 아닌, 디자이너에게 브랜드 라인 전체의 크리에이티브를 맡겼습니다. 질 샌더의 미학과 유니클로의 철학이 충돌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 이유도 살펴볼만해요. 불필요한 걸 걷어내고 소재와 쓰임에 따른 디자인으로 승부하는 등, 두 브랜드의 포지셔닝과 가격은 달랐지만 무척이나 닮아 있었습니다. 둘의 정합이 +J를 단순한 콜라보레이션이 아니라 하나의 브랜드로 느끼게 만든 이유였죠. 2011년 계약이 끝났다가 2020년 다시 한번 부활한 것도 이들의 찰떡궁합을 방증하는 사례에요.
2020년에 다시 돌아온 +J / 자료 출처 유니클로
유니클로의 전략은 2024년 지방시와 클로에를 거친 클레어 웨이트 켈러의 영입으로 본격화됩니다. 켈러는 지방시 아티스틱 디렉터 시절, 2018년 영국 왕실 결혼의 웨딩드레스를 디자인한 디자이너예요. 해리 왕자 옆에 나란히 선 메건 마클이 입은 웨딩드레스가 전 세계 중계 화면에 잡히던 순간, 패션계 안팎에서 그녀의 이름이 검색됐어요. 그 덕분에 타임지가 선정한 2019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명단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죠. 다만 유니클로는 그녀를 바로 메인 CD로 앉히지 않았어요. 2023년 먼저 유니클로 : C라는 서브라인 디자이너로 합류시키고, 1년의 기간을 거친 뒤 2024년 남녀복 전체를 총괄하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승격시켰습니다. 유니클로는 브랜드가 보유한 다양한 라인에 부분적 혹은 순차적으로 디자이너를 녹여 내며, 브랜드와 디자이너의 색깔 모두 잃지 않는 방식으로 SPA 생태계를 리드하고 있었어요.
클레어 웨이트 켈러와 그녀의 컬렉션 / 자료 출처 uniqlo today
02 브랜드의 포지셔닝에 따라, GU
유니클로의 자매 브랜드 GU는 더 저렴하고 더 트렌디한 포지션에 있어요. 유니클로가 LifeWear라는 철학으로 낡지 않는 기본을 지향한다면, GU는 그보다는 조금 더 예민하게 현재의 시즌을 더 빠르게 반영하는 브랜드예요. 같은 패스트 리테일링 그룹 안에 있지만 목표, 타깃, 지향 모두 달라요. 단순히 유니클로보다 가격과 퀄리티가 가벼운 브랜드는 아닌 것이죠.
2026년 초, 패스트 리테일링은 마르니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였던 프란체스코 리소를 GU의 CD로 임명했어요. 리소는 2016년부터 2025년까지 마르니를 이끈 디자이너예요. 마르니는 원래 패션 인사이더 중심으로 소수의 열광을 받던 컬트 브랜드였는데, 그가 재임하는 동안 MZ세대가 가장 열망하는 브랜드 중 하나로 바뀌었어요. 그 비결은 색의 활용. 색 활용의 기존 문법을 따르지 않는 색 조합이 하나의 콤비가 되었고, 그것이 마르니를 설명하는 그 자체가 되었죠. 10년간 함께한 그가 마르니를 떠날 때 업계 반응이 아쉬움으로 가득했던 건, 브랜드에 변화를 주는 것을 넘어 새로운 장을 열었기 때문이었을거예요.
2022년에 진행했던 마르니와 유니클로의 합작 / 자료 출처 마르니
그런 리소를 GU에 영입한 패스트 리테일링의 포트폴리오 설계와 브랜드 포지셔닝 전략이 눈 여겨 볼 만해요. 유니클로에는 클레어 웨이트 켈러와 크리스토프 르메르(에르메스 여성복 CD 출신으로 유니클로 U를 10년째 이끌고 있어요)를, GU에는 프란체스코 리소를. 그룹 안에서 각 브랜드의 가격대와 방향 및 감도에 맞는 디자이너를 다르게 배치한 것이죠. 어떤 디자이너를 어느 브랜드에 붙이느냐에 따라 그 브랜드가 나아가고자 하는 것이 달라지고, 그 방향성이 곧 브랜드의 포지션닝이 되기 때문이죠.
GU와 리소의 만남은 어떤 작품을 보여줄까? / 자료 출처 마르니
03 유연함과 정통성의 만남, 자라
지방시, 디올, 마르지엘라를 자신의 색으로 입혀온 존 갈리아노. 갈리아노가 어떤 디자이너인지는 그의 디올 시절 새들백을 디자인하고, 그가 15년동안 선보인 아카이브 피스들이 지금 경매에서 수십만 달러에 거래된다는 사실로 말할 수 있어요. 마르지엘라에서 보낸 10년은 디올과는 대조적으로 화려한 연출보다는 브랜드의 해체와 재구성에 집중하며, 컬트 브랜드에서 가장 뜨거운 럭셔리 하우스로 끌어 올린 시간이었죠. 그 디자이너가 이제 자라와 2년짜리 크리에이티브 파트너십을 선언했습니다.
2020년에 마르지엘라에서 해체주의와 재구성의 정수를 보여준 존 갈리아노 / 자료 출처 Gorunway
자라는 그 이전에도 럭셔리 디자이너와의 협업을 시도해왔어요. 나르시소 로드리게스, 케이트 모스, 스테파노 필라티와의 캡슐 컬렉션이 있었죠. 하지만 모두 한 시즌짜리의 프로젝트였어요. 갈리아노와의 만남은 자라의 아카이브를 해체해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진행돼요. 단순히 디자이너의 이름을 빌리는 게 아니라, 그의 디자인 철학을 브랜드 안으로 깊숙히 들이는 것이죠. 첫 결과물은 2026년 9월 FW 시즌부터 순차적으로 공개될 예정이에요.
자라와 크리에이티브 파트너십을 체결한 존 갈리아노 / 자료 출처 존 갈리아노
이 파격적인 뉴스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현재 패션 시장에서의 자라의 상황을 살펴 볼 필요가 있어요. 산업 내에서 독특한 포지션을 차지하고 있던 패스트 리테일과 SPA 시장에 쉬인, 테무 같은 울트라 패스트 패션이 속도와 가격에서 자라를 압도하기 시작했어요. 더 빠르게, 더 싸게의 경쟁에서는 더 이상 자라가 우위에 있지 않아요. 그래서 자라가 선택한 것은 디자인의 속도 경쟁이 아닌 브랜드에 문화와 권위를 들이는 것이었어요. 아카이브 피스가 경매에서 수십만 달러에 거래되는 디자이너, 쇼 하나가 예술적 사건으로 기록된 디자이너와의 파트너십은 자라라는 브랜드에 지금까지 없었던 정통 있는 크리에이티브를 부여해요. 천재 디자이너가 지금까지 걸어온 럭셔리 패션의 정통성과 방법론을 브랜드 안에 이식하는 방식으로 지금의 상황을 타개하고 앞으로 나아갈 길을 찾고자 하는 것입니다. 결과가 어떨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이 만남이 SPA 브랜드는 물론이고 패션계 전체가 주목할 장면이라는 것은 분명해요.
2024년에 존 갈리아노가 마르지엘라에서 보인 작품
04 새로운 기대, 갭
갭GAP은 조금 다른 맥락에서 이 카드를 꺼내 들었어요. 유니클로나 자라처럼 브랜드가 성장하는 국면에서의 선택이 아니라, 잃어버린 정체성을 찾기 위해서 꺼낸 카드이기 때문이에요. 갭은 수십년 동안 미국 캐주얼 문화의 아이콘이었어요. 그 이미지가 흐릿해지는 동안 브랜드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어요. 여러 번 크리에이티브 방향을 바꾸려 했고, 2020년대 초 칸예 웨스트와의 10년 파트너십 계획이 2년 만에 파탄 난 것도 그 시도 중 하나였죠.
갭의 크리에이티브를 이끌고 있는 잭 포즌 / 자료 출처 잭 포즌 SNS
2024년 영입한 잭 포즌은 할리우드와 가장 가까이 있었던 디자이너입니다. 나탈리 포트만, 클레어 데인스, 리한나의 레드카펫 드레스를 도맡았고, 미국 대통령 취임식 무대에 오른 드레스도 그의 손에서 나왔어요. 재단의 정교함으로 유명해서, 한 인터뷰에서 ‘나는 옷이 몸을 만나는 순간을 설계한다’고 말하기도 했죠. 그럼에도 자신의 이름을 내건 브랜드는 2019년에 파산했어요. 럭셔리 시장의 구조 안에서 독립 브랜드로 살아남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준 사례였죠. 갭은 그럼에도 그의 크레딧을 샀습니다.
클래식과 정적임, 그리고 럭셔리의 만남 / 자료 출처 패션비즈
결과는 곧 바로 나타났어요. 포즌이 다빈 조이 랜돌프를 위해 만든 메트 갈라 드레스, 앤 해서웨이가 입은 화이트 셔츠 드레스는 온라인에서 빠르게 품절됐어요. 팝업과 패션쇼를 통해 갭이라는 이름이 다시 대화 안에 올라오기 시작했죠. 케데헌의 이재(김은재)도 커스텀 드레스를 입고 공식 석상에 섰어요.
잭 포즌의 갭을 입은 앤 해서웨이 / 자료 출처 패션비즈
다만 이 전략의 한계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디자이너 한 명이 브랜드의 모든 구조적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거든요. 포즌의 영입으로 화제와 세일즈는 만들었지만, 그것이 장기적인 브랜드 자산으로 이어질지는 다른 문제이죠. 10년 후에 돌아 보았을 때에, 이 영입이 또 다른 프로젝트의 사례로 끝날지 브랜드의 역사를 바꿀 수 있을지, 그 스토리는 아직 진행중입니다.
05 디자이너들이 움직이는 이유
이쯤에서 질문의 방향을 바꿔 볼게요. SPA가 디자이너를 원하는 이유에서, 반대로 ‘디자이너들이 SPA를 선택하는 이유’로요. 정량적인 이유로는 안정적인 보수와 브랜드가 보유한 수천 개의 매장, 수백만 명의 고객, 글로벌 공급망 등의 거대한 인프라라고 할 수 있어요. 럭셔리 메종에서는 꿈도 꾸지 못할 고객 도달 범위를 SPA는 제공하고 있는 것이죠. 킴 존스가 중국 아우터 브랜드 보시덩의 서브 브랜드 Areal을 맡으면서 샤넬, 에르메스, 프라다처럼 독립적으로 크게 될 수 있다고 말한 것, 프란체스코 리소가 리얼 피플을 위한 옷을 만들고 싶다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말이죠. 그간 SPA가 쌓아 온 인프라와 시간을 비롯해, 소비 심리와 경제 상황, SNS을 통한 다양한 콘텐츠의 생성 등 패션 업계 내외부의 복합적인 환경에 영향을 받으며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어요.
보시덩의 서브 브랜드 Areal로 향한 킴 존스 / 자료 출처 하입비스트
럭셔리 메종이 맺고 있는 크리에이티브와의 관계 및 고용 형태도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어요. 1990년대 칼 라거펠트는 샤넬에서 36년을, 마크 제이콥스는 루이 비통에서 16년을 이끌었어요. 당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라는 자리는 긴 호흡으로 브랜드의 색을 함께 만들어 가는 역할이었죠. 지금은 그 호흡이 많이 짧아졌습니다. 최근 데이터에 따르면 2020년대 주요 메종의 평균 CD 재임 기간은 약 3년으로, 1990년대의 평균 재임 기간인 10년에서 크게 줄었어요.
2024년과 2025년은 이 현상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난 시기예요. 샤넬, 셀린느, 보테가 베네타에 새로운 수장이 동시에 부임했고, 구찌는 임명된 지 2년 만에 사바토 데 사르노를 교체했어요. 디올과 마르지엘라도 수장이 바뀌었고요. 한 해에 이 규모의 메종들이 동시에 크리에이티브 리더십을 교체한 건 전례를 찾기 어려운 수준이에요. 크리이에티브의 자율성보다 재정 압박과 주주 기대치가 브랜드의 의사 결정에 더 깊숙히 관여한 결과이죠.
이러한 상황 속에서 SPA는 디자이너들에게 새로운 길을 제안하는 것이에요. 이제는 럭셔리 브랜드에서 SPA 브랜드로의 이동이 과연 커리어의 후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은 오뜨 꾸뛰르 쇼에서 볼 수 있는 크리에이티브가 4만 원짜리 셔츠에 담길 수 있는 이런 흐름을 패션의 상향 평준화로 보시나요, 아니면 하향 평준화로 보시나요? 런웨이의 문법을 SPA 브랜드의 피팅룸에서 걸쳐볼 수 있는 것을 희소성의 말소라고 보아야 할까요? SPA 브랜드에 새로운 바람이 부는 동시에 럭셔리의 문턱이 낮아지는 일이 동시에 일어나는 것, 그 두 방향이 서로를 상쇄하면서 패션의 개념 자체가 다시 정의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유니클로 U를 만들어 가고 있는 사라 린 트란과 크리스토프 르메르 / 자료 출처 유니클로
여러 층의 패션계는 결국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럭셔리 브랜드는 어스피레이셔널 소비자를 잃은 빈자리를 초고가 전략과 극소수 VIP 고객으로 채우려 하고, SPA는 그 이탈한 소비자들을 크리에이티브 권위로 흡수하고자 하고 있죠.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 메릴 스트립이 말했던, 럭셔리 브랜드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새로운 패션과 색을 만들면 아울렛으로 대중에게 흘러가는 구조. 그 구조는 이제는 어제까지의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오늘 레터에서 다룬 이야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비마이비는 우선 존 갈리아노의 자라가 너무도 기대됩니다.
우리는 패션의 지형의 변화를 목격하고 있다 / 자료 출처 20세기폭스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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